개념적 인플레이션
- 2025-09-13
- 저자: AK
사회 일반이 어떤 기술에 대해 품는 기대치의 하한선이 점차 높아지면서 예전부터 쓰던 용어의 뜻이 점차 변해간다. 자동차가 왜 자동차인지, 인공지능 세탁기가 왜 인공지능인지 의아하게 느껴진다. 지금 당연하게 쓰는 용어들이 미래엔 어떤 느낌으로 변할까?
자동 프로그래밍과 자동차
옛날엔 기계어가 아닌 코드를 자동으로 기계어로 변환해주는 걸 “자동 프로그래밍automatic programming”이라고 불렀다. 쉽게 말해서 누구든 컴파일러나 인터프리터를 쓰면 이미 자동 프로그래밍을 하고 있는거다. 하지만 지금 듣기에는 이 용어가 무척 어색하다. 고작 그게 자동이라고?
자동차auto를 자동차라고 부르는 것도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말(마차)이나 사람(인력거)이 힘을 줘서 밀거나 끌지 않아도 움직이니까 자동차라고 불렀던 것인데 지금 듣기에는 무척 어색하다. 고작 그게 자동이라고?
인공지능
“인공지능”이라는 용어도 비슷하다. 1980년대에는 마이크로칩이 내장되어 있으면 일단 덮어놓고 “인공지능” 또는 “스마트”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세탁기에 마이크로칩이 있어서 “예약 세탁” 같은 간단한 기능을 제공하면 인공지능 세탁기라고 불렀다. 간단한 산술연산을 할 수 있는 상용화된 기계가 없었던 시대(고작 100년 전이다)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컴퓨터”는 직업으로 계산을 해주고 돈을 버는 사람들을 이르는 용어였고 산술연산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지능적 행위로 여겨졌다. 소수의 수학자들이 “기계적 절차에 의한 계산”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지만 절대 다수의 대중에게 계산이라는 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지능적 행위로 간주됐다. 하지만 이제는 탁상용 계산기에 “지능”이 있다고 말하면 아주 어색하다. 고작 그게 지능이라고?
언젠가는 2022년의 ChatGPT 3.5에 열광하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이미 어색하게 느낄지 모른다. ChatGPT 4.0에서 AGI의 불꽃이 느껴진다던 감상도 곧 어색하게 느껴질테다.
에이전틱 코딩
“자동”과 “인공지능”이 만나면 2025년에 우리가 에이전트 기반 코딩이라고 부르는 방식이 된다. 이 용어에 대한 기대는 곱절로 빠르게 상승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가 “에이전틱하다”라고 여기는 시스템은 조만간 전혀 에이전틱하게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2030년 사람들은 2025년의 “에이전틱 코딩” 시스템을 보며 어떤 어색함을 느낄까? 내 생각엔 일단 “에이전틱 코딩”에서 “코딩”을 다른 무언가로 바꿔야할 것 같다. “에이전틱 소프트웨어 제작/운영”처럼 지금보다 층위가 높아지지 않을까. 코딩을 기계가 알아서 하는 건 너무 당연할테니.
코드 리뷰는 어떨까? 지금은 코드 리뷰 단계가 병목이지만(에이전틱 코딩 전부터도 코드 리뷰는 원래 병목이었는데 이제는 더 심해졌다), 앞으로는 사람이 리뷰할 필요가 없어진다고 보는 게 당연할 것 같다.
에이전틱 경영
좀 더 층위를 올려보면 어떨까?
소프트웨어 제작 및 운영만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는 건 비즈니스 관점에서는 지역 최적화에 불과하다. 전역 최적화를 하려면 “에이전틱 경영” 같은 개념이 필요할까? 이 시대에는 “AI가 아닌 인간 경영자가 필요한 이유를 이사회에서 입증하지 못하면” 경영자가 퇴출될까? 경영자는 퇴출되며 이런 생각을 할까?
예전에 내가 개발자들에게 “AI가 아닌 인간 개발자가 필요한 이유를 입증하라”고 강요할 당시엔 그게 내 처지가 될 줄은 정말 몰랐네. 경영적 의사결정만큼은 인간의 고도화된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고 여겼는데….
아주아주 운이 좋으면, 모든 생산이 로봇과 AI에 의해 자동화되고 정의로운 분배가 일어나는 세상이 올 수도 있을텐데, 그 세상이 오기 전에 어떤 과정들을 거치게 될까?